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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에어] 시위현장 청소하는 흑인 노인

총 118건. 그동안 리포트 중 흑인 관련 기사 건수다. 총 리포트가 1200개 정도 되니 JTBC LA 특파원으로 근무하면 써 온 기사의 10분의 1은 흑인과 관련된 내용인 셈이다. 안타깝게도 인종차별 이슈, 경찰 과잉진압으로 숨진 비무장 흑인에 대한 사건이 대부분이다. 사건, 사고를 다루는 것이 기자의 숙명이긴 하지만 인종차별 관련 사건의 피해자가 주로 흑인이라는 점은 슬프다. 백인 경관의 무릎에 목이 눌려 숨진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대한 항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애틀랜타에서 또 흑인 남성이 백인 경찰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레이샤드 브룩스는 지난 12일 밤 웬디스 햄버거 매장 앞에서 음주 측정 문제로 경찰관 2명과 몸싸움을 벌이다 한 경찰관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사건 당시 영상이 공개됐다. 경찰은 테이저건을 빼앗아 달아나던 브룩스에게 총격을 가했다. 브룩스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을 거뒀다. 딸의 8번째 생일날 밤에 일어난 일이다. 유족들의 기자회견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2살 딸을 안고 기자 회견장에 나온 부인 토미카 밀러는 “경찰의 총격은 살인”이라며 “만약 내 남편이 경찰을 총으로 쏘는 일이 발생했다면 남편은 종신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갔을 것”이라며 해당 경찰관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미국의 인종 문제는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미국의 원죄’로 표현될 정도의 역사 속에 복잡미묘한 감정을 안고 있다. 인종 차별 관련 항의 시위 현장에 가면 흑인들의 분노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에 대한 항의 시위는 약탈과 방화로까지 번졌다. 사건이 발생한 미니애폴리스뿐 아니라 애틀랜타, 뉴욕, LA 등 미국 도시 곳곳에서 약탈과 방화가 일어나 피해가 이어졌다. 시위 현장에서 만난 한 흑인 여성은 “미국은 인종차별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다”며 “불에 타고 부서진 건물은 고칠 수 있지만, 인종차별 문제를 고치지 못하는 것이 정말 문제”라고 한탄했다. 경찰 과잉진압 사건은 항상 논란을 안고 있다. 평화적인 시위가 주를 이루지만 일부 과격 시위대의 폭력과 사건 당시 일부 피해 흑인들이 행동이 과잉진압을 불러 왔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누군가의 아버지, 아들, 친구의 목숨을 잃게 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위 현장의 모습 중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2014년 비무장 상태에서 경찰 총에 사망한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에 대한 시위가 소요사태로 번져 퍼거슨에 현장 취재 때 본 흑인 할아버지의 뒷모습이다. 당시 퍼거슨에서는 밤낮으로 시위가 이어졌고 일부 상점은 불에 타고 경찰과 시위대 충돌이 벌어졌다. 젊은 흑인들은 밤낮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분노를 토해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한 흑인 할아버지는 시위가 잠시 중단되면 어디선가 나타나 시위대가 던진 잔해물들로 덮인 거리를 청소했다. 인터뷰를 청해볼까 했다가 쓰레기를 주워 담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에 이미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모두 담겨 있기에 아무 말도 묻지 않었다. 할아버지는 자기만이 방법으로 오랜 시간 지녀온 인종차별에 대한 아픔을 표현하며 다음 세대에 대한 당부를 하고 있었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관련된 경찰관들이 모두 기소됐다. 이번 만큼은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퍼거슨에서 봤던 할아버지가 미소 지을만한 결과를 기대해 본다. 부소현 JTBC LA특파원·부장 bue.sohyun@jtbc.co.kr

2020-06-15

[온 에어] 재앙에 대비하는 사람들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벌써 8년 전 일인데 사촌보다 가깝게 지내던 A가족이 어느 날 갑자기 시골로 이사하겠다고 했다. 같은 동네에 살아서 하루 이틀이 멀다고 왕래하던 가족이 LA에서 차로 6시간 넘게 떨어진 시골로 간다니 마치 생이별을 하는 것 같았다. A가족은 살던 집을 처분해 농장 부지를 사서 집을 짓고 과수원을 만들고 가축도 길렀다. 가공식품을 사야 하는 것이 아니면 굳이 상점을 가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없는 게 없었다. 염소 젖을 짜 우유와 치즈까지 만들어 먹을 정도라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갈 거라 믿는다. A가족은 시골행 1년 만에 완벽한 그들만의 요새를 만들었다. A가족이 요새를 만든 건 언젠가 올지도 모를 재앙 때문이다. 지구는 지진, 전염병, 전쟁, 자연재해, 경제 붕괴 등의 위험에 둘러싸여 있고 이런 재앙을 맞게 되면 식량난을 겪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대재앙의 때가 먼 미래이면 좋겠지만 자녀, 혹은 그다음 세대에 겪게 될 수 있으니 미리 준비해 둬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그때마다 ‘에이 설마…’하고 넘겨 버렸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행복하게 사는 A가족의 모습이 보기 좋긴 했지만 예전처럼 도시에 살았다면 아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있었을 거란 생각에 A가족의 결정이 솔직히 내내 못마땅하기도 했다. 미국발 코로나19 기사를 쓰기 시작한 게 벌써 한 달이 넘는다. 그 사이 워싱턴주에서 첫 확진 환자가 나왔고 대한항공 확진 승무원이 LA를 거쳐 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LA한인타운이 발칵 뒤집혔다. 집단 감염이 발생한 크루즈선이 들어 온다는 발표에 밤을 새우고 오클랜드 항구에 다녀오기도 했다. 설마 설마 하는 사이 환자는 눈덩이처럼 늘어났고 LA시와 캘리포니아주는 앞다퉈 자택 대피령을 내렸다. 자택 대피령이 내려진 첫날 베벌리힐스의 모습은 마치 영화 세트장 같았다. 하루 사이 거리는 텅 비고 명품 매장 안 고가품들도 싹 사라졌다. 항상 인파로 북적이던 할리우드 거리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의 연속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가 어색했는데, 이제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왠지 눈치가 보인다. 전문가들은 캘리포니아주는 17일, 뉴욕은 이번 주를 정점으로 보고 있다. 워싱턴대학 글로벌보건연구센터는 지금 추세로 보면 17일 사망자가 정점을 이루고 앞으로 3개월 내로 캘리포니아 내 코로나19 사망자가 5000명을 넘을 것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2주가 고비다. 하지만 고비가 잘 넘어갔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이 새롭고 무서운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없는 한 또다시 확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6월, 7월까지 자택 대피령이 연장될 수도 있다는 예상에 힘이 빠진다. A가족은 잘 지내고 있다. 사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 A가족의 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나무는 더 많아지고 가축도 더 늘어났단다. A가족의 결정이 옳았던 걸까? 3주 전 겨우 주문에 성공한 휴지 배달이 자꾸 늦어져 걱정이다. 부소현 JTBC LA특파원·부장 bue.sohyun@jtbc.co.kr

2020-04-07

[온 에어] 전세계 공조 시급한 코로나 사태

미국 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확진자 11명(3일 현재 기준). 지난달 21일 첫 확진자가 나온 이후 2주 만에 감염자 수가 10명을 넘어섰다. 대부분 최근 중국 우한을 다녀온 후 감염이 확인됐고 이 중 2명은 사람 간 감염, 즉 2차 감염자다. 미국은 지난주 전세기를 띄워 우한에 있는 자국민 195명을 본국으로 대피시켰다. 탑승객들은 출발 전 2번, 경유지인 앵커리지에서 2번 더 검진을 받았고 아직 리버사이드에 있는 공군기지에 격리돼 있다. 당국은 전세기 도착 몇 시간 전 최종 도착지를 온타리오 국제공항에서 인근 공군기지로 변경했다. 공군기지가 전염을 막는 데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는데, 직접 가보니 이해가 됐다. LA에서 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마치 공군기지(March Air Reserve Base)는 허허벌판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는 곳에 있다. 프리웨이와 인접해 있는데 주변에 주택가나 사람이 모일 만한 장소가 없어 임시 격리소로는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에 안심이 됐다. 첫 번째 확진자가 나왔을 때만 해도 미국 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위험은 매우 낮은 상태라고 했던 미국 정부는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연일 강경책을 내놓고 있다. 비상사태 선포로 지난 2일 오후 5시부터 최근 2주 내 중국을 다녀온 외국인에 대한 입국 금지 조치 시행에 들어갔다. 우한이 속한 후베이성에 갔다가 귀국하는 미국인들도 별도 시설에서 14일간 의무적으로 격리된다. 후베이성이 아닌 다른 중국 지역에 머물다 귀국하는 미국 시민도 일부 선별된 공항에서 입국 때 건강 검사를 받은 뒤 14일간 자가 격리를 해야 한다. 미국 항공사들의 중국 항공편 취소도 잇따르고 있다. 중국을 오가는 항공편을 전면 취소했던 아메리칸항공은 홍콩행 항공편까지 취소시켰다. 델타항공은 당초 6일로 예정됐던 미국 중국 간 항공편 운항 중단을 앞당겨 3일부터 전면 실시했다. 이런 미국에 대해 중국은 불만이 크다. 미국이 고의로 패닉을 조장하고 있다는 거다. 3일 중국 당국은 “미국은 전 세계 대중을 공포에 몰아넣는 선동을 중단하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중국은 세계보건기구 WHO가 교역, 여행 제한은 반대한다고 권고한 점을 강조하며 유행병 예방 대처 능력과 시설을 가진 미국 같은 선진국들이 오히려 과도한 제한을 앞장서 부과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지적돼야 한다고 말했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국가간 협력은 절실하다. 그렇다고 국민을 바이러스 확산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국민 보호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는 미국을 포함한 각국 정부의 움직임을 탓할 수는 없다. 두 달 만에 사망자가 360명을 넘었고 누적 확진자는 1만7000명 이상이다. 2003년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 넣은 사스 위력을 넘어섰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2주간이 바이러스 확산 절정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열흘 만에 벼락치기로 1000개 병상 규모의 병원을 만든 중국이 2차 확산을 막는데 저력을 발휘해 주길 바란다. 전세기를 띄우고 빗장을 걸어 잠그는 등의 더이상 '과도한' 제한을 할 이유가 없게끔 말이다. 부소현 JTBC LA특파원·부장 bue.sohyun@jtbc.co.kr

2020-02-03

[온 에어] '롤모델과 함께 일했던 건 행운'

헤아려 보니 25년 전이다. 아침에 겨우 눈을 떠 TV를 켜니 성수대교 붕괴 사고 속보로 난리가 나 있었다. 간밤에 건넜던 다리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니 잠이 홀딱 달아났다. 툭 끊어져 버린 다리 상판, 아슬아슬하게 걸린 버스, 구조 헬기와 응급차들…. 믿을 수 없는 사고가 어지럽게 전파를 타는데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는 냉정할 만큼 침착했다. 마치 산산이 조각나 떨어지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을 최대한 상처 없이 집어내 제대로 모양을 맞춰 보여 주려는 듯 차분하게 사고를 전했다. 아나운서를 꿈꾸던 시절, 그 모습이 무척이나 닮고 싶었고 그렇게 그는 나의 롤모델이 됐다. 한국시간 2일 롤모델 손석희 JTBC 대표이사 사장이 정치개혁을 주제로 열린 ‘JTBC 신년특집 대토론’을 끝으로 뉴스룸 앵커로서의 6년 4개월의 긴 여정을 마무리했다. 그는 토론이 끝나고 “그동안 지켜봐 주신 시청자분들께 감사드린다”는 말과 함께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작별을 고했다. "'뉴스룸’ 앵커로 있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이 배웠다”고도 짧게 소회했다. 손석희 사장은 1984년 방송을 시작해 뉴스 진행을 비롯해 여러 토론 프로그램,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을 맡아 주목을 받았다. 2013년 5월 JTBC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뉴스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형식의 ‘뉴스룸’을 만들었다. ‘팩트체크, '앵커브리핑' 등의 코너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뉴스 밖 소식을 전하는 '비하인드 뉴스'도 '뉴스룸'의 자랑거리로 자리 잡았다. 기상 캐스터 없이 앵커가 직접 날씨를 전한 뒤 이어지는 엔딩곡은 딱딱한 뉴스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소통 통로를 만들어 줬다. JTBC의 슬로건인 '사실, 공정, 균형, 품위'있는 뉴스를 위해 기자들에게는 한 걸음 더 들어간 취재를 요구했고 쉬운 말 전달과 현장을 뛰라는 주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쓰고 보니 한 줄밖에 안 되는데 그날 그날 방송 시간에 맞춰 리포트를 만들어 내야 하는 기자들에게는 진땀 나고 입을 바짝 말리는 주문이다. 허리케인, 토네이도 등 기상 관련 리포트를 쓸 때는 단순히 피해 수준만 전했다간 어김없이 다시 쓰라는 지시가 떨어져 원인을 알아내느라 온갖 자료를 뒤져야 했다. 현장 전달을 위해 스탠딩 장소를 찾느라 밤거리를 헤맨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그가 앵커로 있었던 6년 4개월 동안 '뉴스룸'은 크게 성장했다. 세월호 참사, 국정농단 사태 등의 이슈를 이끌었고 2016년 국정농단 사건 관련 태블릿PC 보도에서는 시청률 10%를 넘겼다. 미디어 어워드에서는 공정성 부문에서 JTBC가 3년 연속 1위에 올랐다. 인생의 롤모델과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건 기자에겐 행운이었다. 진땀 나고 입을 말리는 지시 뒤에는 따뜻한 격려와 날카로운 평가를 선물로 받았고 이런 경험은 모두 소중한 자산이 됐다. 2019년 12월31일 방송된 '뉴스룸'의 947회째 마지막 앵커브리핑에서 그는 끊임없는 움직임에 대해 말했다. 노벨문학상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 중 "움직여. 계속 가.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문구를 인용해 "삶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불안정한 것이니 흔들리고, 방황하며 실패할지라도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멈추지 않는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란다"며 아일랜드 켈트족의 기도문을 끝으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그간의 앵커브리핑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설명과 함께 이어진 기도문으로 독자들에게는 새해 인사, 나의 롤모델에게는 감사 인사를 전한다.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항상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길…." 부소현 JTBC LA특파원·부장 bue.sohyun@jtbc.co.kr

2020-01-03

[온 에어] '민식이 법'과 '헌준이 법'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고가 난 곳은 충남 아산 한 초등학교 앞이다. 지난 9월 11일 9살 민식이는 동생 민후의 손을 붙잡고 어린이 보호구역 건널목을 건너다 과속차량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사고 차량은 민식이를 치고 나서 3m를 더 질주한 다음에야 겨우 멈춰섰다. 민식이와 함께 있던 동생은 머리에 타박상을 입었다. 이른바 ‘스쿨존’으로 정해진 곳이다. 그러나 이 곳에는 신호등도 과속 단속 카메라도 없었다. 가해자는 귀가조치 됐다. 민식이 가족은 즐거워야 할 추석 연휴 아이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민식이가 없는 상상도 못해 보았을 일상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민식이 아빠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살아있는 형아가 보고 싶다며 우는 둘째를 달래다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고 했다. 잠든 아이들을 보며 ‘저기에 우리 민식이가 있어야 하는데, 내 새끼 어디 갔나’하며 울다 지쳐 잠이 든다고…. 허망하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감히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민식이 부모는 그러나 슬픔 속에 멈춰 있지만은 않았다. 다시는 민식이처럼 세상을 떠나는 아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민식이 법’ 입법을 위해 세상에 나섰다. ‘민식이 법’은 어린이 보호구역 내에 과속방지 카메라와 신호등을 설치하고 스쿨존 내에서 사고를 낸 가해자에게 가중처벌을 해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민식이 부모는 더 이상 제2의 민식이가 생겨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시민들의 서명을 받고 인터뷰를 하고 있다. 법을 꼭 통과시켜 나중에 한스럽지 않게 민식이 곁에 가고 싶다는 것이 부부의 바람이다. 한국시간 27일 방송된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에서 ‘민식이 법’에 대한 내용이 다뤄졌다. 손석희 앵커는 “그렇게 쓰이라고 지어준 이름은 아니다”라고 한 민식이 엄마 박초희씨의 마음을 전하며 "행복한 의미로만 사용하고 싶었으나 부모는 아이 이름 뒤에 '법'이란 단어를 붙이는 것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에서 법안의 빠른 통과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고, 여야 모두 법안 처리에 공감대를 이뤘다. 그러나 '민식이 법'은 현재 처리가 불투명해진 상태다. 자유한국당이 한국시간 29일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카드를 꺼내들며 본회의에 상정된 199개 법안의 발이 묶였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본회의를 개의해 민식이 법을 통과시킨 다음 필리버스터의 기회를 달라"며 "다만 국회의장이 선거법을 직권상정 안 하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고 조건을 걸었다. 필리버스터 신청 소식에 민식이 부모를 포함한 어린이 안전 관련법 통과를 요구해오던 피해 어린이 부모들은 "왜 아이들을 협상 카드로 쓰냐"며 강하게 항의했다. 민식이 아빠 김태양씨는 "이미 억울하게 죽은 아이들을 두 번 죽였다“라며 "선거법과 아이들의 법안을 바꾸는 것, 그게 과연 사람으로서 할 짓이냐?"라고 비판했다. 4년 전, 스쿨버스 질식사 취재를 위해 만난 헌준이 가족을 잊지 못한다. 발달 장애를 가지고 있던 헌준이는 2015년 9월 스쿨버스 안에 7시간 넘게 방치돼 있다가 결국 숨을 거뒀다. 학생들이 다 내렸는지 제대로 보지않은 운전사의 불찰이 낳은 비극이다. 이후 천사와 같던 아들을 잃은 헌준이 부모는 일명 '이헌준 법'을 만들어 냈다. 스쿨버스 운전사가 시동을 끄면 알람이 울리도록 해 차에서 내리지 않은 아이들이 있는지 확인하도록 한 법이다. 법안이 주지사 서명을 받아 낸 날 열린 기자회견에서 헌준이 엄마는 아들이 하늘에서 안아주는 것 같다며 기뻐했다. 헌준이 부모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 밖으로 나왔을 민식이 아빠 엄마도 하루빨리 소망을 이룰 수 있길 바란다. 부소현 JTBC LA특파원·부장 bue.sohyun@jtbc.co.kr

2019-12-01

[온 에어] 예측 불가능한 재난 '산불'

해마다 가을이면 산불로 일이 더 분주하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이례적인 남부 대도시 토네이도 재난 보도에 맞물려 캘리포니아 산불에 발동이 걸리고 말았다. 앞서 본격적인 산불 시즌 시작과 함께 주 전역에 샌타애나 강풍까지 예보되자 전력회사는 강제 단전이라는 초강력 조치를 내렸다. 산불 위험 지역 수백만 가구에 전력 공급을 중단해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에서는 30만 명이 전기 없는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단전도 산불의 기세를 막지는 못했다. 최근 발생한 대형 산불만 되짚어도 벌써 여러 건이다. 지난 10일 LA 북서쪽 실마에서 난 산불도 피해가 컸다. 집에 불이 나는 것을 막아 보려던 50대 남성이 숨지는 등의 인명피해가 났고 주택 30여 채가 불에 타고 주민 10만여 명이 대피했다. 취재를 위해 찾은 피해 지역은 산불 때문에 몇 년 전에도 갔던 곳이다. 불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 돌고 돌아 발견한 주택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타 있었다. 보름도 채 안돼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대형산불이 났다. 와인 산지로 유명한 소노마카운티에서 발생한 '킨케이드 산불'은 28일 현재 6만6000에이커를 넘게 태우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서울 전체 면적의 44%에 달하는 규모다. 10%까지 올랐던 진화율은 하룻밤 사이 5%로 떨어졌다. 최고시속 90마일을 넘는 강풍에 무서운 속도로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주택 40채를 포함한 96채 건물이 불에 탔다. 유서 깊은 와인 양조장도 잿더미가 됐다.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모양새다. 여기에 '게티 산불'까지 더해졌다. 28일 LA 서쪽 셔먼오크스 인근 405번 프리웨이 서쪽 언덕에서 시작된 산불은 벨에어, 웨스트우드, 브렌트우드 고급 주택가를 위협하고 있다. 산불이 시작된 지 10시간도 안 돼 건물 8채와 2.5제곱킬로미터를 집어삼켰다. 현장 취재를 위해 산불이 진행 중인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405번 프리웨이 인근에 잡목을 따라 불이 번지고 있는 곳을 찾아 영상을 찍고 있는 사이에도 몇 차례나 소방헬기가 물을 뿌리고 지나갔지만 불씨는 남아 있었다. 산불 취재를 가 보면 산불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지를 알 수 있다. 불에 홀딱 타버린 집 바로 옆집은 멀쩡히 남아 있고 산불은 근처에도 온 것 같지 않아 되돌아 가는 길에 피해 현장을 발견하기도 한다. 인근에서 산불이 나면 불씨가 바람에 튀어 언제 산불 피해를 입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거다. 대피령이 내려지면 주저 없이 집을 떠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전에 취재로 만났던 LA소방국 관계자가 산불 원인을 묻는 질문에 캘리포니아는 산불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답했다. 건조한 날씨에 바람, 더위까지 3박자가 맞춰지면 산불은 예외없이 난다며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주민들이 자신이 산불 위험 지역에 살고 있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고 피해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상청은 산불의 주범으로 꼽히는 샌타애나 바람이 최소 30일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보했다. 이번 달 말까지 비 예보도 없어 최악의 상황이다. 올해는 더는 산불 피해 현장을 찾아 헤매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큰 욕심이 아니길 간절히 소망한다. 부소현 JTBC LA특파원·부장 bue.sohyun@jtbc.co.kr

2019-10-28

[온 에어] '버닝썬' 사태로 불타는 연예계

한국의 '버닝썬'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모양새다. 소위 '잘 나가는' 서울 강남 클럽의 폭행 사건이 가수 승리의 성접대, 약물 강간, 불법 동영상 촬영, 공권력과의 유착 의혹까지 몰고 왔다. 여기에 가수 겸 방송인인 정준영이 승리와의 단톡방에 성관계 불법 촬영 동영상을 올린 것까지 폭로되면서 문제의 단체 카톡방에 있던 연예인들까지 줄줄이 소환되고 있다. 공개된 단톡방 대화 내용은 믿기 힘든 수준이다. 여성을 성 상품으로 취급하며 성 폭행을 마치 자랑인 냥 늘어놓고 관련 영상까지 올려 공유해 피해 여성들에게 수치심이라는 족쇄를 채웠다. 이들은 자신들이 한 짓이 범죄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화 중 '강간했네', '살인만 안 했지 구속될 일 많다'는 등의 대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오갔다. 정준영은 부적절한 장소에서 성관계를 한 자신을 '쓰레기'라고 칭하며 히히덕 거렸다. 자칭 쓰레기인 그에게 죄에 대한 두려움은 있었을까? 3년 전에도 여자친구 불법촬영 사건으로 논란을 빚었던 정준영에게 공권력은 그저 만만한 내 편이었다. 당시 해당 사건은 무혐의 처리됐고 불법 촬영의 핵심 증거물인 휴대전화는 수사에서 아예 제외됐다. 무혐의 처리 후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며 기자들을 불러 모아 고개를 숙였던 정준영은 오래 지나지 않아 카톡방에 "내가 그분하고 이렇게 해서 (사건을) 무마했어" "경찰이 생일 축하한다고 전화왔어" 등의 문자를 써대며 자랑을 했다. 승리는 어떤가. 본인 소유의 클럽 VIP들에게 A는 애교가 많다, B는 술자리에서 기분을 잘 맞춘다 등의 친절한 설명까지 하며 포주 노릇을 했다. 소매업으로 신고해 문을 연 업소에서는 버젓이 술을 팔며 불법 영업을 하면서 주변 인물들에게 '단속이 뜨면 돈 좀 찔러 주자'고 말했다. 이들은 굳이 명함을 들고다니지 않아도 대접받는 연예인이라는 이점을 악용하며 만만한 세상을 살아온 거다. CNN과 BBC 등 외신들도 이번 사태에 주목했다. 기사에는 'K팝 섹스 스캔들'이라는 제목이 달렸다. CNN은 이번 추문은 K 문화에서 보았던 어떤 스캔들보다 충격적이라고 실었다. 한 여성 인권 운동가는 "이 사건은 남성 K팝 스타도 예외없이 여성을 착취하는 한국 현실의 일부를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반짝하고 끝날 줄 알았던 K팝 인기는 상상 이상이다. 콘서트에서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야외 노숙까지 감수하는 팬들의 열정은 과장이 아니다. 취재 현장에서 만난 K팝 팬들에게 왜 좋은지를 물으면 예외없이 듣게 되는 답이 있다. K팝 스타들의 순수하고 반듯한 모습이 좋다는 거다. 정돈된 칼 군무, 깔끔한 의상, 하나같이 인형같이 멋있고 예쁜 모습은 다른 팝스타들과는 비교 불가라는 것이다. 한국언론들은 이번 사태가 마치 고구마 줄기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일명 '버닝썬 게이트'와 관련해 문제가 줄줄이 엮여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승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진실을 얘기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 상황"이라며 "수사기관조차 카카오톡 내용이 다 사실이고,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해외 원정 도박과 성매매 알선은 없었다"며 숱한 의혹에 선을 그었다. 미국 카지노에서 2억원을 땄다는 내용의 카카오톡도 모두 허풍이라니 아직도 그에게 세상은 만만한가 보다. 무섭도록 용감한 이들에게 만만한 세상을 선사한 건 누굴까? 일거수 일투족을 관리했을 소속사가 과감한 일탈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추악한 고구마 줄기가 잘나가는 연예인 몇 명의 일탈로 뚝 잘리지 않길 바란다. 부소현 JTBC LA특파원·부장 bue.sohyun@jtbc.co.kr

2019-03-22

[온 에어] 첨단 DNA분석 기술의 '두 얼굴'

단서는 작은 머리뼈 한 조각. 혈흔도, 찢어진 옷도 없었다. 누군가 살해된 것은 분명한데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답답한 상황. 사건은 해결될 수 있을까? 경찰은 수개월째 유해의 신원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미궁 속에 빠진 사건을 해결한 건 다름 아닌 DNA 신기술이다. 경찰은 현장에서 확보한 뼈 조각을 벤처기업, 파라본 나노랩스(Parabon NanoLabs)에 보냈다. DNA를 넘겨받은 파라본 나노랩스는 유전자 분석을 통해, 유해의 몽타주를 그려냈고 유해 신원을 파악한 경찰은 주변을 탐색해 범인 체포에 성공했다. 플로리다 주에서 발생한 연쇄 성폭행범, '시리얼 클리퍼(Serial Creeper)'를 잡아낸 것도 DNA분석 기술이다. 경찰은 범행 현장에서 범인이 흘리고 간 것으로 보이는 증거를 찾아내긴 했지만 목격자가 한 명도 없어 난항에 부딪혔다. 하지만, DNA분석 기술이 제3의 목격자 역할을 해냈다. '스냅샷(Snapshot)'이라는 신기술이 용의자의 머리카락색, 눈빛, 안색, 가계 혈통 등 몽타주를 재현했다. 40여 년 동안 13명을 살해하고 45명을 성폭행한 연쇄 살인범 '골든스테이트 킬러'도 DNA분석 기술에 덜미를 잡혔다. 범인 조지프 드앤젤로는 전직 경찰관 출신으로 첫 범행 후 40여 년 동안 경찰은 물론 연방수사국까지 동원된 수사망을 피해다녔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은 DNA샘플을 모아 수사망을 좁혀 결국 꼬리를 잡았다. 사건 현장에서 수집한 범인의 DNA 샘플을 이용해 온라인 계보 찾기 사이트의 도움을 받아, 용의 선상에 단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던 드앤젤로의 검거에 성공했다. 경찰은 관련 사건들의 용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의 집 주변 쓰레기통을 뒤져 용의자의 DNA 샘플을 확보해 연구소로 보내 일일이 대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DNA 분석 기술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아직도 여성들을 살해하고 성폭행한 범인들을 이웃으로 두고 살았을지 모른다. 첨단 DNA분석 기술에 대한 JTBC뉴스 리포트에는 당장 기술을 도입해 한국 내 미제사건 해결에 이용해야 한다는 댓글이 달렸다. DNA분석 기술은 미제사건 해결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최근 DNA를 체크해보는 테스트가 인기다. 100달러 정도의 비용이면 자신의 뿌리를 찾아주는 DNA 테스트 업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DNA 테스트를 통해 헤어진 가족을 찾기도 하지만, 난감한 상황에 부딪히기도 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실은 한 가족의 DNA 테스트 관련 기사에 따르면 보스턴의 한 가족은 DNA 테스트로 6명이었던 가족이 9명으로 늘었다. 친자매로 알았던 언니와 동생은 생부가 달랐고, 두 자매에게는 또 다른 남매가 있었다. 부모의 각자 외도로 일어난 일이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아버지가 평생 숨겨왔던 비밀이 DNA 테스트로 낱낱이 밝혀졌다. 생모와 생부가 다른, 복잡한 혈연관계로 얽힌 남매들은 모두 중년의 나이가 됐다. 월스트리트저널은 DNA 테스트로 가족은 혼란에 빠졌다고 전했다. 모든 기술은 양면성을 지닌다. 편리함을 누리는 대신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교통수단으로 환경오염을 겪고 있고 플라스틱을 과용한 탓에 매일 미세 플라스틱을 먹고 산다. 미국 사법당국이 DNA연구소, 파라본 나노랩스의 DNA 분석 기술을 이용해 해결한 사건은 40여 건에 달한다. 최근에는 노화된 얼굴까지 DNA로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연구가 속도를 내고 있다. 시간 속에 감춰졌던 범행의 실체가 세상에 속속 드러나고 있는 반면 DNA분석으로 영원히 닫혀 있어야 할 판도라의 상자도 열리고 있다. DNA분석 기술이 인류에게 요구할 대가가 크지 않길 바란다. 부소현 JTBC LA특파원·부장 bue.sohyun@jtbc.co.kr

2019-02-16

[온 에어] 성범죄자가 반성을 알까

2017년 10월 기사 하나에 할리우드가 발칵 뒤집힌다. 뉴욕타임스는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30여 년간 여배우와 여직원을 성추행해 왔다고 보도했다. 와인스타인은 아니라며 펄쩍 뛰었다. 오히려 뉴욕타임스를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할리우드를 좌지우지하던 거물 영화제작자는 그러나 여배우들의 폭로에 꼬리를 내리게 된다. 애쉴리 저드, 기네스 팰트로, 앤젤리나 졸리 등 수많은 여배우가 와인스타인의 악행을 공개했다. 이후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공유하는 #Me too(미투) 캠페인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와인스타인 폭로기사 이후 1년 동안 정치, 연예, 문화 등 미국 사회 전반의 유명인 429명의 성추행 기사가 보도됐다. 업종별로 보면 정치, 정부공무원과 연예계 종사자가 각각 96명으로 가장 많았고 예술 음악계(58명)와 미디어(48명)가 뒤를 이었다. 하루 한 명 이상의 유명인들의 추악한 민낯이 만 천하에 드러난 셈이다. 그러나 처벌은 공개 망신 수준에 그친 경우가 많다. 성추행 혐의를 받은 정부 공무원 59명 중 35명이 현직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망신이라도 줄 수 있지만 벙어리 냉가슴만 앓아야 하는 피해자도 많다.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되거나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미 평등고용기회 위원회 조사결과 직장에서 성추행을 당한 4명 중 3명은 회사나 노조에 보고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투'캠페인이 시작된 지 2년째 되가지만 성추행 피해자를 위한 제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캠페인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1월 서지현 검사의 용기가 한국 '미투'의 시작이 됐다. 서 검사는 JTBC '뉴스룸'에서 안태근 전 검사장에게 성추행과 인사보복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이후 각계 유명인사에 대한 수많은 미투 고발이 이어졌다. 정치, 문화, 연예, 스포츠계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가해자가 응당한 대가를 치른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조재범 전 국가대표 쇼트트랙 코치의 성폭행 혐의가 수면 위로 올라와 충격을 주고 있다. 평창올림픽을 한 달 앞두고 조 코치의 폭행을 견딜 수 없다며 선수촌을 뛰쳐나갔던 심석희 선수는 조 전 코치에게 받은 성폭행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 심 선수 측이 제출한 고소장에는 미성년자인 만 17살 때부터 조 전 코치에게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고 적혀 있다. 심 선수가 선수 상습폭행으로 이미 구속된 조 전 코치를 성폭행으로 추가 고소한 것은 그를 곧 다시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다. 조씨는 폭행 피해자들과 합의를 시도해 형량 줄이기를 하는 한편 폭행으로 대표팀 코치직에서 물러난 뒤 중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준비했다. 반성은커녕 재기를 노리는 그를 막을 방법은 또 다른 고통을 드러내는 것밖에 없었다. '미투' 이후 미국 사회 변화를 취재하기 위해 빌 코스비, 하비 와인스타인, 트럼프 대통령의 성추행 피해자 변호를 맡고 있는 글로리아 알레드를 만났다. 40여 년간 여성인권 변호사로 일하며 수많은 성범죄 피해자를 대변해 온 그는 피해 여성들의 두려움에 대해 말했다. 이 두려움이 가해 남성에게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것이다. 두려워 말하지 못할 것을 이용하는 성범죄자들을 그는 '약탈자'로 표현했다. 성추행 피해를 입은 유튜브 진행자 양예원 씨는 가해자에게 실형이 선고된 직후 기자들 앞에 서서 성추행 피해자들에게 잘못한 거 없으니 숨지 말고 용기를 내라며 눈물을 흘렸다. 두려움을 무기로 쓴 약탈자를 두렵게 만들 강력한 사회 시스템 마련이 절실하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아직 갈 길이 멀다. 부소현 JTBC LA특파원·부장 bue.sohyun@jtbc.co.kr

2019-01-10

[온 에어] 허리케인과 백악관 공연

별 피해 없이 지나가 줬으면 했다. 언론에서 호들갑을 떨수록 피해는 예상보다 적었던 일도 종종 있기에 기대를 걸었다. 미국 남동부 지역을 강타한 허리케인 '마이클'은 상륙 전부터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CNN 방송은 정치뉴스를 뒷전으로 미루고 허리케인의 이동 경로를 시시각각으로 알렸다. 메인 앵커들은 현장에서 뉴스를 진행했다. '마이클'의 위력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동 중 위력을 키워 최고 등급보다 한 단계 낮은 4등급으로 플로리다 반도에 상륙했다. 풍속이 조금만 세져도 최고 등급으로 올라갈 기세였다. 미국 국립허리케인 센터는 '마이클'을 괴물 허리케인이라고 설명하고 당장 대피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피해는 해안도시에 집중됐다. 그림 같던 멕시코비치는 폐허로 변했다. 집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간신히 흔적은 남겼다 해도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졌다. 막판까지 폭우를 뿌리면서 피해는 더 커졌다. 플로리다뿐 아니라 노스와 사우스 캐롤라이나, 조지아, 버지니아, 앨라배마 주 등 6개 주에 피해를 입혔다. 플로리다에서만 최소 16명이 숨졌고 버지니아 5명, 노스캐롤라이나 3명, 조지아 2명 등에서 30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파악됐다. 실종자 수가 많아 사망자가 더 늘어 날 수도 있다는 것이 당국의 설명이다. 복구 작업이 속도를 내면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처참한 상흔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주택과 사업체 수백여 채가 피해를 입었고 플로리다에서는 13만 채가 넘는 주택과 사업체에 전기 공급이 끊겨 있는 상태라 주민들의 불편이 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약탈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 현지 방송은 플로리다 베이카운티 경찰국이 허리케인이 지나가고 난 이후 매일 10명꼴로 약탈범을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약탈범들이 부서진 상점과 집에 침입해 닥치는 대로 물건을 훔쳐 피해 복구를 돕느라 눈코 뜰 새 없는 경관들이 약탈범까지 기승을 부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는 실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5일 피해 지역을 시찰했다. 멜라니아 여사와 함께 플로리다와 조지아 주 지역을 방문해 주민들을 만나 고충을 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폭풍의 위력은 엄청났다"며 "내가 여태까지 본 위력을 넘어섰다."라고 말했다. 이어 피해 복구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피해지역 방문 나흘 전 트럼프 대통령은 유명 래퍼 카니예 웨스트를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초강력 허리케인으로 곳곳이 산사태와 물난리를 겪고 있을 때다. 웨스트는 미 연예계, 특히 흑인 연예인들 중 몇 안 되는 트럼프의 지지자로 부인인 킴 카다시안 역시 트럼프와 만난 적이 있다. 웨스트는 이날 트럼프 대통령에게 알맹이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말 많기로 유명한 트럼프 대통령도 웨스트가 쉼 없이 발언을 쏟아내는 통에 처음 5분간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음악전문매체 롤링스톤은 둘의 만남을 "역사상 가장 정신나간 백악관 공연이었다."라고 논평했다. 웨스트는 발언 도중 비속어까지 내뱉었다. CNN은 당일 저녁뉴스에서 트럼프가 웨스트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 장면과 허리케인으로 폐허가 된 플로리다의 모습을 좌우로 편집해 함께 내보냈다. 이어 왜 대통령이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생사를 넘나들며 괴물 허리케인과 싸우고 있을 때 열성 지지자와 함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느냐며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선 출마의사를 묻는 질문에 100%라고 밝혔다.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쓴소리도 마다 않고 듣는 대통령이 절실하다. 부소현 JTBC LA특파원 bue.sohyun@jtbc.co.kr

2018-10-19

[온 에어] "내일은 울지 말자"

88세 김병오 할아버지는 70여 년 만에 여동생을 만났다. 단발머리의 여동생은 백발의 할머니가 됐다. 김 할아버지는 무려 57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북한에 있는 가족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여동생을 만난 김 할아버지는 헤어지기 전날 "내일 울지 말자"라고 동생과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상봉 마지막 날 나란히 앉아 두 손을 꼭 잡은 백발의 남매는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상봉을 마친다는 안내 방송에도 미처 동생의 손을 놓지 못하는 오빠에게 북측 동생은 '바라보는 여생 길에 행복 넘친 우리 세상…' 이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른다. 한국시간 20일 남쪽의 이산가족 89명이 2박 3일간 금강산에 머물며 68년 동안 만나지 못한 혈육 197명을 만났다. 분단 이후 21번째 지난 2015년 이후 2년 10개월 만의 상봉이다. 1985년 고향 방문단으로 시작한 이산가족 상봉으로 직접 혈육을 만난 가족 수는 지난 5월 말 기준으로 4186가족(1만 9930명)뿐이다. 그간 상봉을 신청한 실향민이 13만 2603명. 이 중 7만 5000여 명이 미처 혈육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살아 있는 실향민은 5만 7000명 정도인데 반 이상이 80대 고령이라 매년 4000여 명이 한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살아있는 실향민이라도 혈육을 만날 수 있어야 할 텐데 상봉행사마저 정기적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남북관계가 좋을 때 어쩌다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라 기회를 얻기 힘들다. 희망고문이 따로 없다. 로또 당첨만큼 힘든 행운을 얻어 혈육을 만난다 해도 기쁨은 길지 않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에서 남과 북의 가족들이 함께 보낸 시각은 고작 11시간에 불과하다. 만남 이후 재회도 보장받지 못한다. 통일이 되지 않는 한 죽기 전에 그래도 한번은 만났다는 위로로 여생을 사는 수밖에 없다. 1985년 첫 이산가족 상봉행사 후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남한뿐 아니라 북한도 많이 변했다. 30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술이 넘치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이산가족 상봉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남북이 이산가족 상봉을 생색내기용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난이 높다. 양측 모두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알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생사와 주소확인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실향민들의 생각이다. 이산가족 등록자 중 사망자를 제외한 5만7000여 명이 상봉 대상자이지만 건강 문제 등으로 상봉 행사에 갈 수 있는 대상자는 1만 명 안팎에 불과하다. 그러니 먼저 생사부터 알고 안부를 주고 받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순서다. 분단 독일은 통일 30여 년 전인 1960년대부터 연금수혜자인 고령 이산가족을 우선 대상으로 정해 동서독 간 방문을 할 수 있도록 하고 편지 전화 연락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동생의 노래를 뒤로하고 남측으로 오는 버스에 올라탄 백발의 오빠는 쉴새 없이 손을 흔드는 동생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보게 되는 가슴 저미는 모습이다. 5만7000명의 이산가족이 혈육을 만나는 아니 생사라도 확인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부소현 JTBC LA특파원 bue.sohyun@jtbc.co.kr

2018-08-24

[온 에어] '태국의 기적' 일군 영웅들

13명 실종. 동굴 고립. 전원 무사 생환은 어려울 거란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폭우에 동굴 곳곳이 침수됐다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어렵사리 모두 살아있다는 것은 확인됐지만 생존을 안 기쁨은 잠시였다. 소년들이 잠수를 배워 나오려면 최대 넉 달이 걸릴 수도 있었다. 절망적이었지만 포기는 없었다. 전 세계 전문가와 장비들이 앞다퉈 동굴에 도착했다. 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간절한 응원이 이어졌다. 태국 당국과 다국적 구조대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렸다. 동굴이 침수돼 구조가 어려웠지만 비가 더 올 것으로 예보되자 본격적인 구조 작전에 나선 것이다. 잠수부 2명이 한 조를 이뤄 아이들을 1명씩 데리고 나오기 시작했다. 동굴 폭이 40cm에 불과한 곳에서는 산소통을 벗고 빠져나와야 했다. 숨막히는 구조작전이 시작된 지 사흘 만에 축구단 소속 소년 12명과 코치 1명 전원이 구조됐다. 마지막 생환자인 코치가 구조된 직후 동굴에 찬 물을 뽑아내던 배수펌프가 고장나 순식간에 동굴 안에 물이 차오르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니 하늘도 도왔다. 기적 같은 일이다. 하지만 기적만 바라고 있었다면 물이 차오른 동굴에 갇혔던 13명은 영원히 가족 품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전원구조'라는 단 하나의 임무를 위해 전력을 쏟은 국가가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집중해 얻어낸 기적같은 결과다. 국적과 인종을 떠나 단지 '살리자'는 염원으로 구조에 참여한 영웅들이 있었다. 동굴에 고립된 소년들을 처음 발견한 것은 영국 잠수사들이었다. 소방관 출신과 IT전문가 잠수사가 동굴을 잠수해 들어가 살아있는 소년들의 모습을 찍어 전세계에 전했다.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는 기폭제가 됐다. 호주에서 합류한 동굴 잠수 전문가이자 의사도 숨은 영웅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동굴에 남아 소년들과 코치의 건강을 확인해 구조를 도왔다. 아이들을 지킨 코치의 헌신도 훌륭하다. 25살의 이 청년은 고립된 동굴에서 아이들에게 식량을 양보하며 버텼다. 구조대원을 통해 보내온 편지에는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 돌볼 것을 약속한다"며 동굴로 데려온 것을 사죄한다고 썼다. 기적과 과학이 소중한 생명을 구했고 분쟁으로 얼룩져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적지 않은 전 세계인에게 깊은 감동을 전했다. 태국에서 날아온 기적과 감동은 앞서 우리가 겪은 비극적인 사고와 늑장 대응으로 숨진 희생자들을 떠오르게 한다. 특히 살아 있을지 모르는 아이들을 시커먼 바다에 두고 결국 사망자 시신도 모두 수습하지 못한 세월호 사고의 아픔을 어찌 잊으랴. 느슨했던 당시 정부의 대응과 아직 사고 책임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잘잘못을 따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비루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태국 네이비실이 동굴에 갇혀 있던 13명의 유소년 축구팀 소년과 코치 전원을 구조했다는 소식에 대해 트위터에 "세계가 태국의 기적을 지켜봤다"면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국가의 역할을 보았다"고 적었다. 더는 비극적인 사고는 없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하지만 한치 앞을 모르는 이 세상, 만약 또 어떤 사고를 맞게 된다면 태국 국민이 노력과 최선으로 얻어낸 기적이 우리에게도 존재하길 염원한다. 미국의 한 영화 제작사가 태국에 프로듀서를 보내 동굴소년 구조작업의 영화 플롯 구성을 시작했단다. 해피엔딩 영화는 언제나 편안한 감동을 준다. 태국 소년들의 이야기. 해피엔딩이어서 천만다행이다. 부소현 부장·JTBC LA특파원 bue.sohyun@jtbc.co.kr

2018-07-15

[온 에어] SNS속의 '꾸민 행복'

#. 그의 삶은 완벽해 보였다. 항상 웃어주는 다정한 남편과 더 없이 귀여운 아들, 잡지나 광고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림 같은 집. 일상도 한없이 여유롭다. 쇼핑, 여행, 외식, 이벤트…. 일로 지치거나, 심심해 지루하거나, 우울하거나, 섭섭할 일 따위는 없다. 쇼핑은 항상 부담없이, 일상이 지루하다 싶으면 짐을 싸 훌쩍 해외 여행을 떠난다. 기분이 우울한 날이면 근사한 곳에서 외식, 없는 기념일도 일부러 만들어 이벤트를 챙기는 남편 덕분에 섭섭할 일도 없다. 우연히 접해 보게 된 '행복 OO녀' 인스타그램 얘기다. 그의 완벽해 보이는 삶을 담은 수백 장의 사진에는 부러움이 담긴 찬사의 댓글이 수도 없이 달려 있다. "너무 행복해 보여요" "또 해외에 계신 건가요?" "원피스 정보 좀 알려 주세요." 댓글들에는 감사의 답글이 빼곡히 적혀 있다. 소셜미디어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라기에 들여다 봤는데 보면 볼수록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로 시작된 감정은 자연스럽게 내 일상과 비교되며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로 변했다. 괜히 우울해지는 것 같아 창을 닫고 빠져나오니 다시 현실이다. #. 한국에 있는 친구와의 오랜만의 긴 통화.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으로 사진만 보고 형식적인 안부만 물어오다 이날은 작정하고 수다를 떨었다. 이것저것 삶에 대한 투정을 늘어놓자 친구도 그동안 덮어 놨던 깊은 속 얘기를 한다. 친구는 마음을 많이 다쳤고 그래서 많이 외롭고 힘든 중이었다. 까맣게 몰랐다. SNS 때문이다. 여유 있고 넘치게 풍요로워 보이는 SNS속 친구의 모습을 보이는 대로 믿었고 그래서 친구가 행복한 줄만 알았다. 일면 부럽기도 했었는데…. 친구에게 '너 행복한 줄 알았어'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애써 공들여 예쁘게 싸 놓은 인생의 포장지를 내 맘대로 찢어 버릴 수는 없었다. #. 언젠가 자동차 사이드 미러에 써 있는 '사물은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다'는 문구에 빗대 'SNS에 보이는 삶은 현실보다 더 행복하다'고 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SNS 속 공개된 일기장이 누가 볼세라 늦은 밤 이불을 뒤집어 쓰고 꾹꾹 눌러 쓴 나만의 일기장과 같을 수는 없다. 다소 과장되고 현실과 다를 수 있는 건 당연하다. SNS는 이미 우리 삶에 깊이 파고 들었다. 쉽게 지인의 안부를 묻고 실시간으로 소통한다. 내가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을 갖기도 전에 SNS를 통해 이미 상대방을 파악하고 알고 이해했다고 믿어 버린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편리함이 사람들간 보이지 않는 거리와 벽을 쌓게 한다. SNS 속의 화려한 타인의 삶은 내 인생을 우울하게 만들어 버리고 내가 포장한 SNS의 삶에 갇혀 속을 드러내지 못해 더 외로워 지기도 한다. SNS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가식적이고 행복한 척한다는 건 아니다. 분명 공개된 삶보다 실제 삶이 더 행복하고 진실할 수도 있다. 다만 행복해 보여야 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굴레 속에 갇혀, 맞지 않는 신발과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답답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SNS가 세상을 행복으로 가장한 감옥으로 만들까 두렵다. 부소현 차장·JTBC 특파원 bue.sohyun@jtbc.co.kr

2018-06-01

[온 에어] '캐나다 차량 돌진' 취재를 돌아보며

사망 10명, 부상 15명. 범인은 승합차를 몰고 시속 60㎞가 넘는 속도로 인도를 돌진했다. 거리는 화창한 봄날을 맞아 점심을 먹으러 나온 인파들로 붐비고 있었다. 목격자들은 차량에 치인 사람들이 공중에 붕 떴다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유모차가 튕겨져 날아가는 것을 봤다는 진술도 나왔다. 지난 24일 토론토 핀치 애비뉴 영스트리트에서 벌어진 일이다. 범인은 렌트한 벤 차량을 몰고 작정한 듯 사람들을 향해 내달렸고 평화롭던 거리에서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참상이 벌어졌다. 관련 속보가 쏟아지며 사건이 일어난 곳이 한인 밀집 지역이라는 내용이 파악됐다. 한인상점들이 모여 있어 평소 한인들과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라 한인 피해자가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공식적인 사상자 신원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현지 한인들 사이에서 유학생 등 한인이 3명이나 숨졌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JTBC 제보 창구에 사건 당시 현지에 있던 한인들의 제보도 들어왔다. 인도를 빠르게 지나가는 사건 차량이 찍힌 한 한인 상점 CCTV에 찍힌 제보 영상에는 직원들이 놀라 뛰어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상점 대표는 사건 현장에서 한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심폐소생술 받았지만 숨진 것 같았다는 내용을 전했다. 한국 외교부는 사건이 발생한 지 반나절 정도 지난 후 한국 국민 2명과 캐나다 국적 동포 1명이 사망했고 한국인 2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속보 내용을 중심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외신을 통해 들어온 현장 영상과 목격자들이 전한 당시의 상황도 기사에 포함시켰다. 이번 사건은 1989년 몬트리올 공대에서 한 남학생이 14명의 여학생을 살해하고 자살한 사건 이후 캐나다에서 발생한 최악의 참사다. 특히 사건이 발생한 곳은 상점이 밀집해 있고 인파가 붐비는 번화가다. 하지만, 캐나다 언론을 통해 공개된 영상은 찌그러진 사건 차량, 도로에 떨어져 있는 피해자의 신발과 가방 등 흐트러진 물건들,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용의자 모습뿐이었다. CCTV나 시민들이 찍은 영상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언론에 노출된 사건 현장의 모습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타지역에서 벌어진 유사 사건들과 비교하면 5분의 1도 안 되는 양이라 방송기사 특성상 다양한 영상을 확보해야 하는 기자의 입장에서는 리포트 제작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관련 기사들을 다시 한 번 세심히 훑어보며 다급하게 리포트를 만들며 가졌던 제한적인 사건 현장 영상에 대해 기자로서 가졌던 불만을 깊이 반성했다. 현지 언론이 피해자를 배려해 자극적인 영상을 일부러 노출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도로 곳곳에 설치돼 있는 CCTV영상 일부만 공개됐어도 목격자들이 전한 참상은 여과 없이 만천하에 드러났을 터지만 현지 언론은 사건을 신중히 다뤘다. 범행 동기에 대한 추측도 자제했다. 자칫 인종차별 범죄로 볼 수도 있는 사건이지만 아직 확실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만큼 사상자나 용의자의 인종을 문제 삼거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언론의 홍수 속, 치열한 경쟁 속에 묻히다 보면 사건, 사고의 팩트보다 대중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는 실수를 하게 될 때가 있다. 이번 사건 속보를 챙기며 생생하고 다양한 영상을 내보내고 싶었던 것도 기사에 대한 관심도를 끌어올리고 싶었던 욕심이었음을 고백한다. 현지 언론은 캐나다 곳곳에서 불고 있는 피해자 추모 열기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사와 함께 다양한 현장 영상을 내놓고 있다. 오늘도 여전히 반성하고 배운다. 부소현 JTBC LA특파원 bue.sohyun@jtbc.co.kr

2018-04-27

[온 에어] 지금 당장 뭐든 해라

"Do something now(뭐든 지금 당장 해라)." 밸런타인스데이인 지난 14일, 플로리다 주에서 발생한 교내 총기난사 사건으로 14살 딸을 잃은 어머니가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쏟아낸 외침이다. 아니 절규다. 딸의 장례 준비를 하고 왔다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학교에 간 딸이 총에 맞아 이 세상에 없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며 울분했다. 총격이 발생한 곳은 마이애미 북쪽 파크랜드에 있는 마조리 스톤맨 더글라스 고등학교. 총격은 수업이 끝나기 10분 전쯤 시작됐다. 총격범이 많은 학생을 복도로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화재경보기를 작동시켰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 학교 퇴학생으로 학교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만큼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쏘기 위한 시도였다. 소름끼친다.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들의 사진과 신상이 실린 기사를 읽어 내려갈수록 목이 메어왔다. 차마 끝까지 보기가 힘들다. 하나같이 예쁘고, 귀엽고, 늠름하고 무엇보다 맑은 정신이 비추어져 얼굴에서 빛이 났다. 생면부지 평생 옷깃도 한번 스치고 지날 수 없을 먼 인연일지 모르는 그들의 인생이 아깝고 억울해 화가 난다. 가족들은 오죽할까.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언제 또 이런 비극이 일어날 지 모른다며 두려워했다. 매일 등교하는 학교에서 총소리를 들었으니 세상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총격범 니콜라스 크루스는 합법적으로 구입한 총을 들고 학교에 와서 무차별 총격을 벌였다. 소셜미디어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기들을 자랑하고 여러 차례 위협했다. 참극은 예정돼 있었지만 아무도 막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희생자와 가족들을 애도한다는 글을 남겼다. 총기규제에 대한 구체적은 언급은 아직 없다. 총보다는 정신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지난해 11월 텍사스 주의 한 교회에서 괴한이 난입해 총기를 난사해 무려 2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도 이것은 '총기 문제가 아닌 정신건강 문제'라고 강조했다. 정신이 건강하지 않더라도 총을 구할 수 없었으면 맑은 정신을 가진 17명의 소중한 목숨을 잃는 참사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오바마 전 대통령도 입을 열었다. 플로리다 주 파크랜드 고교 총기 난사 사건과 관련해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우리는 파크랜드 일로 비통하지만 무력하지 않다"며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우리의 첫 번째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다수 미국인이 원하고, 오래전 해결했어야 하는 총기규제법을 포함해서, 진심으로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충분히 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샌디 훅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렸던 그는 이번에도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올해 들어 미국 내 중·고등학교에서만 4번째 총격이 발생했고 학교와 학교 부지에서 일어난 총격은 10번이 넘는다. 샌디 훅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이후 방탄 담요, 방탄 배낭 등 학생 용 방탄 제품들이 등장했다. 교내 총격 사건이 날 때마다 관련 제품 판매도 늘었다. '뭐 이런 것까지' 했었는데 아이가 학교에 가게 되면 하나 사서 들려 보내야지 싶다. 하지만 방탄 배낭을 메고 학교에 가는 아이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속이 탄다. "Do something now"란 말이 절로 나온다. 부소현 JTBC LA 특파원 bue.sohyun@jtbc.co.kr

2018-02-18

[온 에어] '미투' 앞장선 여검사의 용기

"당신에게 175년, 2100개월 형을 선고합니다. 다시는 감옥 밖으로 걸어서 나갈 자격이 없습니다." 30여년간 160여 명의 체조 선수들을 성추행, 성폭행해 온 전 미국 체조 대표팀 주치의에게 지난 24일 내려진 판결이다. 래리 나사르는 피해자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용서를 구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언론이 피해 여성들의 거짓말을 침소봉대했다는 나사르의 편지를 읽던 판사는 급기야 편지를 집어던져 버렸다. 나사르의 심리가 진행된 7일간 156명의 여성들이 법정에 나와 증언했다. 여성들은 때론 눈물을 때론 분노를 쏟아냈다. 미국 체조 마루운동 챔피언이었던 마티 라슨은 15~16세 때쯤 집 샤워실에서 벽에 일부러 다치려고 머리를 부딪쳤다고 털어놨다. 나사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자해를 했다는 것이다. 나사르는 겉으로 보기에는 다정다감하고 자신의 일에 열정적인 의사였다. 1986년부터 2015년까지 국가대표 여자 체조팀 주치의로 일했고 올림픽도 4차례 참가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입을 통해 드러난 나사르의 실체는 추악하기 이를 데 없다. 나사르에게 성폭력을 당한 여성 대부분은 10대 미성년자였고 가장 나이 어린 피해자는 6살에 불과했다. 나사르는 선수의 부모가 함께 있는 방에서도 대담하게 성추행을 저질렀다. 나사르에게 중형이 내려진 것은 그가 어린 소녀들을 심리적으로도 이용했기 때문이다. 운동 중 몸을 다쳐 상처를 입은 소녀들에게 자신이 아픈 몸을 낫게 해줄 유일한 사람으로 믿게 세뇌했다. 실제로 일부 선수들은 그를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믿기도 했다. 그의 추악함은 체조선수 출신인 한 여성 변호사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수면 위로 드러났다. 레이첼 덴홀랜더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낱낱이 고발했고 수치심 때문에 입을 닫고 있었던 여성들의 동참이 이어졌다. 덴홀랜더의 용기가 어린 시절의 아픔으로 성폭력 후유증을 겪고 있었던 여성들을 전사처럼 싸울 수 있도록 했다. 한국시간 25일 JTBC 뉴스를 통해 방송된 나사르 관련 리포트에는 씁쓸한 부러움의 댓글들이 이어졌다. 성폭행 관련 처벌에 관대한 한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지적이 줄을 이었다. 파렴치한 성폭행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사법시스템을 생각하면 어린 소녀들을 치료해 준다며 몹쓸 짓을 한 나사르를 다시는 사회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한 판사의 의지와 미국의 법은 한국에도 절실하다. 29일 JTBC '뉴스룸'에서 현직 여검사가 전직 검찰 간부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기사가 보도됐다. 이어 직접 출연해 손석희 앵커와 인터뷰를 한 서지현 검사는 "성폭력 피해자분들께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것을 얘기해 주고 싶어서 나왔다. 제가 그것을 깨닫는 데 8년이 걸렸다"라고 말했다. 이어 검찰 내에서 성희롱, 성추행, 심지어 성폭행도 이루어진 적이 있다고 폭로했다. 검찰은 나사르의 성추행 사실을 인지하고도 방치한 체조협회와 나사르가 속해 있던 미시간 대학, 올림픽 위원회까지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고 날을 세우고 있다. 조직 내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는 성폭력 범죄를 뿌리째 뽑겠다는 의지다. 서 검사는 피해자가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절대 개혁은 이루질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용기를 냈다고 강조했다. 여 검사의 용기가 이대로 묻힐까 두렵다. 부소현 JTBC LA 특파원 bue.sohyun@jtbc.co.kr

2018-01-29

[온 에어] 사람 살리는 드론

최근 북가주 팔로알토 시가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의료용 드론 사용 허가를 신청했다. 응급 상황 시 병원에서 혈액을 드론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허가가 받아들여 지면 혈액센터에서 병원까지 1시간 정도 걸리는 혈액 수송 시간은 10분으로 단축된다. 병원 내 보관 문제로 사용기한이 지나 버려지는 혈액도 대폭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아프리카 르완다에서는 2016년 10월부터 혈액 및 의약품 수송에 드론을 사용해 왔다. 신기술이 아프리카에서 먼저 상용화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르완다 정부는 의료시설 부족과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응급상황 발생 시 국민들이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드론 제조사의 기술을 일찌감치 받아 들였다. 국가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한 벤처기업의 기술 잠재성에 도박을 걸었고 결과는 성공적이다. 르완다는 드론 도입으로 4시간 이상 걸리던 혈액 수송시간을 평균 20~30분으로 단축시켰다. 하루 150회 이상 드론으로 병원에 혈액이 수송된다. 드론 제조사 지프라인(Zipline)의 켈러 리나우도 대표는 드론 서비스가 시작된 이후 병원의 혈액 소비량은 늘어났지만 파기된 혈액은 0%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필요한 혈액이 적재적소에 쓰여 생명을 살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오랜 내전과 기후 상황으로 도로가 망가져 제대로 된 응급수송이 불가능했던 르완다에서 드론 기술은 산모와 아기를 살리고 위험에 빠진 환자를 구하고 있다. 탄자니아도 올해부터 전국에서 드론 의약품 수송을 시작한다. 사실 드론은 군사 무기로 질타를 받아 왔다. 무방비 상태인 하늘에 무인 항공기가 군사 목적으로 악용된다면 결과는 끔찍하다. 미군의 드론 폭격으로 중동지역에서 민간인과 어린이들을 포함한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목적만 변하면 드론은 사람을 살리는 기술이 된다. 의료용 드론의 개발과 활약은 상상만으로도 흐뭇하다. 혈액 수송에서 나아가 드론이 하늘을 나는 앰뷸런스 역할을 해 준다면 위험 천만의 순간 어디선가 날아와 구해주는 영화 속 슈퍼맨이 부럽지 않다. 지프라인 리나우도 대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무리 외진 곳에 있더라도 기본적인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술 개발을 시작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드론이 쏘아 올려지는 것을 보기 위해 펜스에 몇시간씩 매달려 있는 르완다의 아이들이 앞으로 그런 세상을 만드는데 반드시 큰 역할을 해낼 것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무인 자동차, 초고속 지하터널, 하늘을 나는 자동차 등 멀지 않은 미래에 현실화될 신기술은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돈을 버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주문한 물건이 30분 만에 집 앞에 도착하고 따끈따끈한 피자를 담은 상자가 하늘을 날아 도착하는 세상이 눈 앞에 있다고 설명한다. 상용화에 따른 이익이 최우선 조건이다. 미 연방항공청은 90일 내에 팔로알토 시의 의료용 드론 사용 허가 여부를 결정해 통보할 예정이다. 사람 살리는 드론의 활약이 기대된다. 부소현 JTBC LA특파원 bue.sohyun@jtbc.co.kr

2018-01-09

[온 에어] 비트코인 광풍의 부작용

1년 전 쯤으로 기억한다. "너 돈 좀 벌어볼래?" 한국에 있는 친구가 대뜸 물었다. "돈? 어떻게?". "비트코인 알지?" 친구는 비트코인 투자로 한 달도 안돼 2000만 원을 벌었다고 했다. 가격이 계속 올라갈 거라며 본인은 대출까지 받아 몽땅 비트코인을 샀다고 했다. 과장이 없는 친구라 처음엔 솔깃했다. 방법을 물으니 일단 사이트에 가입을 해야 한단다. 그런데 이 사이트가 좀 이상했다. 대체 어떤 회사인지 알 길이 없었다. 영문으로 돼 있는데 회사 주소도, 대표자 성명도 명시돼 있지 않고 비트코인 구매도 피라미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듯 보였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Fraud(사기)'라는 글이 많기에 친구에게 알렸지만 귀 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요즘 같은 경기에 되는 건 이것뿐 이라며 가격 오르는 재미에 잠도 안 온다며 좋아했다. 더 말려보려 했지만 수익금이 꼬박꼬박 통장으로 들어온다니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비트코인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쭉쭉 올랐다. 비트코인의 고공행진은 연일 계속됐다. 비록 투자는 안 했지만 비트코인 때문에 빚까지 얻었다는 친구 걱정에 가격 변동을 들여다 보자니 그때 나도 좀 사둘 걸 그랬나 후회도 됐다. 몇 달 후 축하도 할 겸 부러움도 전할 겸 한동안 소식이 없던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돈 많이 벌어 좋겠다!" 하지만, 돌아온 답이 황망하다. "2억 날렸어…" 친구가 가입을 권했던 비트코인 관련 사이트는 우려했던 대로 '사기'였다. 친구는 비트코인 가격이 오를 대로 오르자 투자한 돈을 빼낼 수 없게 됐다고 설명했다.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지만 주체가 불분명해 소송도 어려운 상황이라니 답답했다. 암호화폐 시장에 광풍이 불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더 거세다. 시세가 국제 시세보다 20% 정도 높은데도 전 세계 비트코인 거래의 20% 정도가 원화로 결제되고 있다고 한다니 놀랍다. 1년 전만 해도 700~800 달러 선에 불과했던 비트코인이 최근 2만 달러에 육박하면서 투기 과열에 기름을 부었다. 한 구인 사이트에서 직장인 941명을 대상으로 '비트코인 투자 열풍'에 관해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1.3%가 '비트코인 등과 같은 암호화폐에 투자하고 있다'고 답했다. 직장인 10명 중 3명이 암호화폐를 거래하고 있는 셈이다. 암호화폐 열풍에 학업과 직장을 그만두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고 한다. 미성년자들이 다단계 같은 사기 범죄에 이용되는 등 부작용까지 속출하자 정부가 규제에 나섰다. 우선 올해부터 미성년자의 암호화폐 사이트 가입 및 매매, 구매, 입·출금을 금지 시킨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이미 고등학생, 심지어 중학생들까지 비트코인 투자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아 이들이 부모의 개인정보나 휴대폰을 통해 성인 인증이 가능한 편법을 쓴다면 규제는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비트코인 투자로 쓴맛을 본 친구는 최근 작은 사업을 시작해 바쁘다. 경쟁 업체들을 이기려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하루 48시간이라도 모자랄 지경이라고 푸념을 늘어놨지만 목소리에 생기가 넘쳤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에너지의 원천이다. 암호화폐의 미래는 알 수 없다. 꿈을 향한 땀과 노력이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다. 부소현 JTBC LA특파원 bue.sohyun@jtbc.co.kr

2018-01-01

[온 에어] "너희 아버지 뭐하시냐"

"어린 시절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서를 쓸 때가 제일 싫었다." 미혼모였던 어머니의 선택으로 친부가 아닌 이모부의 성을 따라 살아온 한 연예인이 인터뷰를 통해 밝힌 심경이다. 초등학교 시절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것이 있었다. 새 학기가 되면 TV, 전화기 등 집에 있는 물건은 물론 부모의 출신학교와 직업까지 반드시 써내야 했다. 심지어 '아빠가 대학 나온 사람 손들어'라며 아예 대놓고 묻는 경우도 있었다. 시인 황지우는 가정환경조사서의 기억에 대해 "학교에서 지식이 아니라 수치심을 배웠다"라고 했다. 가정환경조사서가 아니라 빈부채점표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대체 이런 걸 왜 하게 할까 쓸 때마다 의아했다. 가정환경조사서를 졸업하고라도 살면서 '아버지는 뭐하시냐?'라는 질문은 적지 않게 받게 된다. 뭉뚱그려 대답하면 어떤 회사에 다니는지, 무슨 사업을 하는지 구체적인 답변이 요구된다. 사람을 만나고 직업을 구하는데 부모가 하는 일이 왜 필요하고 궁금한지는 알 수 없다. 최근 갑질 폭행을 한 한화그룹 셋째 아들 김동선 씨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이번 폭행이 처음이 아니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폭행과 함께 곁들인 말들 때문에 비난이 더 거세다. 김씨는 대형로펌 신입 변호사들과 술을 마시다 "허리 똑바로 펴고 앉아라, 나를 주주님이라고 불러라. 존댓말을 써라"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터져나온 말 "너희 아버지 뭐하시냐". 김 씨는 문제가 불거지자 기억이 안 난다고 해명했다. 이어 "취기가 심하여 당시 그곳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거의 기억하기 어렵다"라며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럽고, 피해자 분들께 엎드려 사죄드리고 용서를 빈다고"라고 밝혔다. 자식사랑이 지극하기로 소문난 한화 김승연 회장도 거들었다. "자식 키우는 것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것 같다"라며 "아버지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무엇보다도 피해자 분들께 사과드린다"라고 말했다. 김씨가 신입 변호사들에게 '너희 아버지가 뭐하시냐?'라고 한 것은 질문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느냐?'로 들린다. 서른도 안된 재벌 아들은 취기를 핑계로 변호사들에게 아버지의 재력을 과시했다. 대한변호사협회가 검찰에 고발장을 접수했고 경찰도 내사에 착수했다. 지난 폭행 사건에서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지만 이번에도 무사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유전무죄 판결이라는 의심 속에 2번의 폭행을 넘겼지만 수사결과에 따라 상해죄가 인정된다면 김 씨는 다시 법정에 서게 되고 보통의 경우 가중처벌을 피할 수 없다. 김씨는 사과문을 통해 적극적인 상담과 치료를 받겠다는 의지를 나타냈지만 김씨의 상습적인 폭행이 상담과 치료로 해결될 수 있을지 아니면 처벌이 필요할지는 법원이 내릴 결정이다. 본인동의 없는 개인 정보 수집과 활용은 2011년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금지됐다. 교육부도 자율기재방식의 학습환경조사서 양식을 개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 사립초등학교가 신입생들에게 출신 유치원과 부모의 종교 등을 적게 하고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부모의 월소득과 월세보증금 액수까지 적게 하는 등 한국사회에 가정환경조사서, 아니 빈부채점표는 여전히 존재한다. 빈부채점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너희 아버지 뭐하시냐'는 질문도 계속될 수 밖에 없다. 부소현 JTBC LA특파원 bue.sohyun@jtbc.co.kr

2017-11-26

[온 에어] 성폭력 이기는 '미투' 캠페인

성폭력 고발 '미투' 캠페인 열기가 뜨겁다. 발단은 하비 와인스틴이다.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인 그가 수십년간 여배우와 여직원들을 성추행 해 왔다는 기사는 영화계를 발칵 뒤집어 놨다. 안젤리나 졸리, 기네스 펠트로 등 유명 배우들의 폭로가 이어지면서 비난이 쏟아졌다. 비난은 성폭력의 현실을 알리자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공유하자며 '나도 성폭력 피해자다', '나도 당했다'의 의미인 'Me too' 캠페인을 제안했다. 이 캠페인은 사실 10년 전 타라나 브룩이라는 흑인 여성운동가로부터 비롯됐다. 성폭력 피해자였던 브룩은 유색인종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Me too'를 캐치프레이즈로 사용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선택한 말로 누군가 자신에게 이 말을 했을 때 강력한 힘을 느낀 것이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Me too'의 힘은 강력했다. 가수 레이디 가가, 배우 리즈 위더스푼 등 많은 스타들이 '미투' 대열에 동참했다. 성폭력 고발 열풍은 연예계 뿐 아니라 의회와 정치, 경제, 노동계로 까지 번졌다. 정치계에서는 민주당의 재키 스파이어 하원의원이 선봉에 섰다. 스파이어 의원은 과거 자신이 의회 직원이던 시절 상사가 강제로 입을 맞추려던 경험을 공유하고 전·현직 의회 직원들과 함께 '미투 콩그레스' 캠페인을 벌여 의회 내 성희롱과 성추행 증언을 모으자고 제안했다. 미투 캠페인은 남성들의 참여도 이끌어 냈다. 미투 캠페인에 대한 답으로 일부 남성들이 자신의 성폭력·성추행 사실을 고백하는 '내가 그랬다(IDidThat)'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소셜미디어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국경과 틀을 벗어나 다양한 방식으로 퍼지고 있다. 캐나다에서는 미투 행진이 열리고 스웨덴 스톡홀름 광장에서는 수천명의 미투 캠페인 지지자들이 모여 성폭력 반대 집회를 열었다. 캠페인의 빠른 확산과 반향은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방증이다. 성희롱, 추행, 폭행, 폭력은 대부분 여성이 저항하기 힘든 환경에서 일어난다. 바꿔 말하면 가해자가 자신의 유리한 사회적, 물리적 환경을 이용하는 것이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가 한 남자 선생님으로 부터 이상한 행동을 요구 받았다며 고민을 털어 놓은 적이 있다. 면담을 하자고 해서 빈 교실에 불려 갔는데 신체 접촉을 시도하고 입을 맞춰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너무 당황하고 놀라 친구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선생님이 또 혼자 있는 공간으로 부르면 무조건 아프다고 꾀병이라도 부려서 절대 가지 말라고 일러 준 것이 전부다. 그 당시만 해도 이런 문제를 말 할 창구도 없었고 상황을 대처하는방법을 가르쳐 준 사람도 배운 적도 없었다. 학교나 다른 선생님에게 알릴 생각도 했었지만 피해를 입은 친구가 오히려 이상한 시선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접어 버렸다.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던 친구의 당부도 무시할 수 없었다. 최근 캔자스 대학에서 성폭행 피해 여성들의 옷이 전시됐다. 전시된 옷의 대부분은 면티에 긴 바지 등 노출이나 자극과는 무관한 옷들이다. 평범한 옷차림으로 성폭력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행 스캔들이 단순한 가십성 기사로 묻히지 않도록 용기있게 행동한 여성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부소현/JTBC LA특파원

2017-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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